‘로봇(robot)’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에서였다. 노동을 의미하는 체코어 ‘robota’가 어원이다. 스스로 작업하는 능력을 갖춘 기계, 로봇. 인간의 노동력을 대처하기 위해 발전해온 로봇은 단순한 기계 부품의 집합이던 과거를 지나 인간을 닮은 모습에 인공지능(AI)을 갖춘 휴머노이드(Humanoid)에까지 이르렀다.

세계에서 단 6팀만 참가한 2019 로보컵 축구 본선에 진출한 히어로즈.

■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라

히어로즈는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휴머노이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인간이 휴머노이드 개발에 집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모든 것은 인간 크기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인간 형태에, 인간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휴머노이드는 일상을 함께하며 우리가 하기 힘든 것 또는 하기 싫은 것을 대신하는 데 적합하다. 사람과 닮았기에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준다. 휴머노이드 개발과 관련해 미국, 독일, 일본 등이 앞선 기술을 보유한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한양대학교 ERICA 히어로즈(HERoEHS: Hanyang Erica Robotics Engineers for Human Society, 한양 에리카 인간사회로봇연구실)가 여러 성과를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로봇공학과 한재권 교수가 이끄는 히어로즈는 2018, 2019년 연속으로 ‘로보컵(RoboCup)’ 축구 부문 본선에 진출했다. 1997년부터 시작된 로보컵은 로봇들의 올림픽이라 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로봇 대회다. 전 세계의 로봇 공학도와 교수진이 모여 새로운 로봇을 테스트하고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는 장이다. 2002년부터 휴머노이드 리그가 추가돼 더 큰 명성을 얻었다. 2019 로보컵은 지난 7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렸다. 축구, 실내 서비스, 산업 자동화, 재난구조 등 다양한 분야의 리그를 통해 참가 로봇들의 우위를 가렸다. 로봇의 기술력은 크기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리그는 키즈(Kids), 틴(Teen), 어덜트(Adult) 사이즈로 나뉘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자국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는 세계적인 대회인 만큼, 올해도 40여 개국에서 3,500명 정도의 엔지니어가 참여했어요. 여러 리그 중에서도 축구 휴머노이드 어덜트 사이즈는 로봇 설계와 경기 진행이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리그입니다. 국내에서는 우리가 최초이자 유일하게 본선에 진출한 팀이에요.”
한재권 교수는 올해 해당 리그에 세계에서 단 6팀만이 참가했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출전 자체가 기술력을 증명하는 리그다. 히어로즈가 선보인 로봇 ‘앨리스(ALICE: Artificial Learning Intelligent Robot for Curture & Entertainment)2’는 신장 130㎝에 몸무게 20㎏, 초등학교 3~4학년 학생 정도에 해당하는 크기다. 부드러운 곡선형으로 친밀감을 높인 디자인을 적용했다.
“로봇이 축구를 한다는 것은 빠르고 안정적인 2족 보행이 가능하고 공간지각, 상황판단 능력을 고루 갖췄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재미있는 이벤트가 아니라 엄청난 기술력을 펼치는 대회죠. 매년 경기 규정이 업그레이드돼서 그에 맞춰 계속 수정, 보완, 발전시켜야 해요. 로보컵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2050년에 휴머노이드 로봇팀이 인간 월드컵 우승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한재권 교수는 히어로즈도 로보컵 규정에 맞춰 계속 업그레이드된 기술력을 선보일 것이라 전했다. 10여 년간 로보컵에 출전해온 팀들에 비하면 아직 부족한 면이 있다. 하지만 히어로즈는 비교하고 좌절하는 대신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몰두한다. 올해 로보컵에 출전한 앨리스2는 지난해의 앨리스1보다 크게 성장했다. 걷는 속도는 6배, 판단 속도는 4배가량 빨라졌다.

■ 뛰어난 스승과 열정 넘치는 제자들의 시너지

2011년에 로보컵 축구 키즈, 어덜트 사이즈 리그를 동시에 석권한 바 있는 한재권 교수.
“초기에는 가로 4m, 세로 3m 수준의 경기장에서 20~30㎝ 작은 로봇들이 대결했어요. 올해는 가로 14m, 세로 11m 크기의 잔디 구장에서 경기를 펼쳤죠. 매년 경기장 크기가 조금씩 넓어져 최종적으로는 실제 축구장과 동일한 룰을 적용하게 됩니다. 경기 시간도 늘어나고요.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푹신한 잔디 위에서 로봇이 걷고 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재권 교수는 공학대학으로부터 제5공학관 지하실 복도에 인조잔디를 설치할 수 있도록 임시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겨우 10×8m 크기의 공간밖에 나오지 않아 실제와 다른 경기장 환경에서 테스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주 현지에서는 그 환경 차이를 메꾸기 위해 급하게 보완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 올해 경기는 전·후반 10분씩에 중간 5분 휴식으로 진행됐다. 주심이 휘슬을 불고 나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로보컵은 로봇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오토노머스 테크놀로지(Autonomous Technology)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실제와 같은 환경에서 시험을 많이 해본 팀에게 유리할 터. 아쉬움이 큰 부분이다. 그래도 앨리스2는 열악한 환경을 딛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쳤다. 한재권 교수는 자식 자랑하는 아빠처럼 앨리스2가 얼마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지 귀띔했다. 180㎝, 45㎏에 달하는 커다란 로봇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고 경기를 치르는 모습에 응원하는 팬들까지 생겼다. 앨리스2가 공을 차고 뺏김에 따라 탄성과 탄식이 번갈아 터졌다.
히어로즈는 2018년 한재권 교수가 로봇공학과 전임교수로 임용되며 꾸려진 연구실이다. 히어로즈가 단기간에 여러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한재권 교수의 역량과 팀원들의 열정 덕분이다. 한 교수는 미국 버지니아공대 유학 시절, 세계적인 로봇공학자로 손꼽히는 데니스 홍(Dennis Hong) 교수의 지도로 로보컵에 출전해 2011년 키즈와 어덜트 사이즈 리그를 동시에 석권하고 최고 휴머노이드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가 만든 로봇 ‘찰리’는 미국 최초의 성인 크기 휴머노이드였으며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1년 올해 최고 발명품 50’으로 꼽혔다. 그런 한재권 교수가 ERICA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15년 산학협력중점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언론을 통해 이미 로봇공학자로 이름을 알린 그가 ERICA에 있다는 소식에 로봇 연구에 뜻을 둔 인재들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청출어람이라 했듯이, 현재 연구실에 소속된 팀원들은 한 교수 못지않게 로봇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직접 구상한 알고리즘이 로봇이라는 하드웨어를 통해 구동될 때 엄청난 희열을 느껴요. 사람들의 일상 가까이에서 활용되는 로봇을 만들고 싶습니다. 학과 공부로는 채우지 못하는 실무적인 부분들을 많이 배우고 있어요.”
학부연구생 원준희 학생(로봇공학과 16)은 어렸을 때부터 한재권 교수가 롤모델이었다고 밝혔다. 한 교수의 SNS를 통해 그가 ERICA에 부임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망설임 없이 지원서를 넣었단다. 메카트로닉스공학과 석사2기 최정훈 학생 역시 한 교수가 부임하자마자 학부연구생으로 합류한 케이스다.
“어렸을 때부터 로봇 만드는 게 꿈이라 올림피아드 같은 대회에 많이 나갔었어요. 하지만 실제 로보컵에 나갔을 때만큼 마음 벅찬 경험은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권위적이지 않고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연구실을 이끌어주셔서 히어로즈는 분위기도 좋고 늘 활력이 넘쳐요.”

■ 좋은 팀워크가 최상의 결과물을 낸다

히어로즈가 개발한 또 다른 로봇.

2년 연속으로 로보컵 축구 부문 본선에 출전한 히어로즈. 앨리스2는 친근한 외모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한재권 교수는 히어로즈의 원동력이 좋은 팀워크라고 강조한다. 로봇, 휴머노이드는 기계와 전기, 전자, 컴퓨터, 디자인, 심리학 등 다양한 지식이 어우러져야 하는 종합과학 분야다. 따라서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면 여러 전문가가 힘을 합치고, 폭넓은 시각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지닌 인재들이 협업해야 한다. 한 교수는 ‘팀의 이익을 위해 잠시 내 것을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지향한다. 이것은 배려, 이해, 양보, 희생, 신뢰, 혜안이 복합돼야 가능한 것이다. 적극성을 성격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좋은 팀워크 아래에서 발휘되는 것이 적극성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히어로즈가 로보컵에서 우승을 차지해 학교 정문에 멋진 플래카드가 걸리는 순간을 꿈꾸고 있어요. 국내에는 아직 휴머노이드뿐 아니라 로봇공학을 정통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소수의 인원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아직 저변이 넓지 않죠. 따라서 로봇공학과를 운영하는 ERICA에서 세계적인 로봇공학자가 많이 배출되길 바랍니다.”
일상을 바꾸고 싶은 인간의 상상과 꿈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고도의 기술이 다시 인간의 삶을 바꾼다. 기술은 그렇게 사람을 향해 있다. 언젠가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휴머노이드가 집마다 보급되는 날이 올 것이다.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을 다각도로 갖춘 로봇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꿈꾸는 사람들. 히어로즈가 만들어나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Posted by hyue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