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일 KBF 슈퍼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두 선수가 피로 범벅이 된 채 경기를 치른다. 검정 트렁크 선수는 능숙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파란 트렁크 선수에게 고전을 면치 못한다. 10라운드 경기 결과는 파란 트렁크 선수의 승리. 2015년 권투를 시작해 4년 만에 한국 챔피언 자리에 오른 그는 ERICA 응용물리학과 출신의 김동우 선수다.

다이어트 때문에 시작한 권투로 챔피언이 되기까지

운동을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복싱이나 종합격투기를 즐겨보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남의 싸움을 뭐가 재미있다고 보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2015년 어느 날 기숙사에서 선배와 시험공부를 하며 야식을 시켜 먹던 그가 다이어트라는 말을 꺼냈다. 이렇게 먹고 찔 수만은 없잖아. 크로스핏을 배우기 위해 학교 앞 ‘브리드 복싱’ 체육관을 찾았다. 권투장인 만큼 체육관 내에는 링과 글러브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권투를 접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관장이 그에게서 ‘권투선수로서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몸이 뻣뻣했지만 무척 성실했습니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와서 권투를 배워나갔죠. 그러다 경험 차원에서 생활체육대회에 내보냈는데 펀치로 상대방을 압도하더군요. 주먹 하나만큼은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브리드 복싱 한진희 관장)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한진희 관장의 칭찬이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럴수록 김 선수는 자신감이 붙었다. 나도 잘하는 게 있었구나. 공부에 딱히 관심이 없던 그는 그렇게 권투에 빠져들었다. 칭찬을 받을수록 더 잘하고 싶었다. 그를 신나게 한 사람은 더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권투를 시작한 동갑내기 ‘전규범’ 선수였다. 권투와 나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쉽게 친해졌다. 전규범 선수는 그보다 앞선 2018년에 KBF 챔피언을 따냈고 지금은 동양챔피언을 위해 뛰고 있다. 김 선수에게는 실력 면에서 자극을 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물리학도였던 김동우 선수는 주변 도움 덕분에 권투라는 세계에 안착했고,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1년 만에 프로권투 라이센스를 취득했고, 2017년에는 신인왕에 올랐다. 그리고 2019년 3월에는 KBF 슈퍼웰터급 챔피언이 되었다.

공부 대신 권투에 올인

사진 왼쪽부터 전규범 선수와 김동우 선수,한진희 관장
물론 시련은 있었다. 몸이 뻣뻣하고 체력이 부족하던 그는 힘과 펀치, 타고난 동체 시력에 의존하는 인파이터였다. 그러다 보니 일방적으로 끌고 가다가도 전세가 역전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두 번의 패배(2017년 경기, 2018년 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역시 그런 흐름 끝에 나온 결과였다. 더군다나 그는 당시 대학원에 입학한 상태였는데 공부와 연구, 권투를 동시에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첫 번째는 대학원과 안정된 수입이 있는 연구실 생활을 포기하고 권투에 올인하자는 것, 두 번째는 권투 스타일을 유연하게 바꿔보자는 것이다.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답을 찾아냈다.
“스피드를 활용해 거리 유지를 하며 점수를 관리하는 아웃파이팅 스타일로 바뀌게 됐죠. 저는 신장(174cm)에 비해 팔 리치(183cm)가 긴 편이라 아웃파이팅에 잘 맞았어요.”
그는 올 3월 3일 서태영 선수와 KBF 슈퍼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을 총 10라운드에 걸쳐 치렀다. 경험이 적은 상대방은 마치 자신의 신인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저돌적이면서도 펀치력이 센 상대방 때문에 몸이 휘청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능숙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포인트를 관리하는 김동우 선수의 경기 운영능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5라운드가 끝나면 중간발표를 해주는데 제가 2~3점 앞서 있었어요. 그때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죠. 생각해보면 두 번의 쓰디쓴 패배가 제게 좋은 보약이 됐어요. 그 패배가 아니라면 전 아직도 단점을 고치지 못했을 거예요. 상대방(서태영) 선수도 이번 패배를 통해 배운 게 많을 겁니다.”
그토록 원하던 챔피언이 되었으니 물론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목표는 한국 챔피언이 아니라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이니까. 이제 동양 챔피언, 그다음에는 세계 챔피언이라 되뇌었다.

억대 파이트머니를 꿈꾸다

김동우 선수는 지난 3월 3일 열린 KBF 슈퍼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혈투 끝에 상대 선수를 판정승으로 누르고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었다
그는 자신이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학사 졸업 이후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응용물리학과 손승우 교수 덕분이었다. 손 교수는 2017년 신인왕전 결승전 때 그에게 트렁크 바지를 맞춰주는 등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밖에도 많은 교수와 동기, 선후배들이 응원을 보내주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배려가 몸에 밴 김 선수의 한결같은 성격 덕분이었을 게다.
가족은 그가 공부 대신 권투를 선택한 것에 대해 우려하진 않았을까. 처음에는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가 챔피언이 된 이후에는 반응이 좋아졌다. 특히 그의 할머니는 이왕 시작한 것이니 세계 챔피언까지 따내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느낌,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 더없이 행복하다는 요즘이다.
김동우 선수는 모교인 한양대학교 ERICA의 후원을 받아 경기에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좋은 친구와 선후배는 물론 언제나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교수님들을 만나게 해준 소중한 학교 아니던가. 그는 자신이 학교 이름을 걸고 경기에 나선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선수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쑥스러운지 웃으며 말했다.
“권투가 제 가슴을 뛰게 해요. 제게 행복을 전해주는 권투를 통해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억대 파이트머니를 받는 권투선수가 되면 학교 이름도 높일 수 있고, 국내 권투계에도 큰 힘이 될 거예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때까지 제 권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되기 위해, 나아가 후배 선수들의 롤모델이 되기 위해 오늘도 훈련에 매진한다. 더 넓은 세계로 가는 첫 관문은 지난 5월 6일에 있었다. 처음으로 외국인(태국) 선수와 맞붙어 1라운드 KO승을 거뒀다. 이제 그의 통산전적은 9전 7승(4KO) 2패이다. 물론 그의 권투 세계가 앞으로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비가 올 테고, 자갈밭이나 늪을 지나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권투가 가슴을 뛰게 한다’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길 바란다. 그 자세가 그의 두 다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그의 온몸과 마음을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끌 테니까.

Posted by hyue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