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은 연초부터 KAL기 폭파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으며, MBC 뉴스 방송사고(내 귀에 도청장치)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긴 지강헌의 인질극처럼 굵직한 사건이 있었다. 대학가요제에서는 고(故) 신해철이 포함된 밴드 무한궤도가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경기도 안산에 자리 잡은 한양대학교 ERICA에서는 88학번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2018년 10월 13일, 그때 그 친구들이 다시 학교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

1980년대 ERICA를 다니며 꿈을 꾸었던 이들이 모처럼 다시 뭉쳤다. 이제는 그때 자신들의 나이와 엇비슷한 자녀를 키우는 중년이 됐지만 표정은 여전히 젊고 싱그러웠다.

학교 자긍심을 일깨워준 홈커밍데이

지난 10월 13일 입학 30주년을 맞은 88학번의 홈커밍데이가 학교에서 열렸다. 서울올림픽 개최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던 그때 새내기로 입학했던 88학번은 모처럼 다시 학교와 마주했다. 토요일 오후 2시 사당역에서 모여 ‘추억의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를 찾은 그들은 학교 홍보대사인 사랑한대의 안내로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교정 곳곳을 둘러보았다. 민주광장에서 출발해 스마트제조러닝센터와 기숙사, 놀리지팩토리, 경상대학과 본관 포토존(사자상)을 거쳐 행사가 열리는 학생복지관 앞에 도착했다.
이번 홈커밍데이에는 주인공인 88학번은 물론 83~87학번을 포함해 총 100여 명의 동문이 참여했으며 이영무 총장과 김우승 부총장은 물론 당시 교수진도 함께해 더욱 즐거운 ‘시간여행’이 되었다. 교정을 둘러본 동문들은 이후 학생복지관 3층 프라임라운지로 이동해 학교에서 준비한 음료와 다과를 즐기며 오랜만에 해후한 동문, 선후배, 교수 등과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한쪽 무대에서는 실용음악학과 재학생들이 분위기를 돋우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음악이 전해주는 무드 덕분일까. 동문들은 시종일관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는 산업공학과 유영창·박재영 동문은 특히 학교의 달라진 모습이 놀랍고 반가웠다.

이날 행사에는 이영무 총장이 참석해 다시 학교를 찾은 동문들에게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유영창 동문과 박재영 동문은 같은 산업공학과 같은 88학번 출신으로 학창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사이였다.

“1980년대에 ‘비놀리아’라는 비누 광고가 유명했어요. 아무리 사용해도 닳지 않는 비누라는 광고였는데, 우리는 당시 학교를 비놀리아 공법으로 만드는 것 같다며 말하고는 했죠. 학교 내 공사 진행 속도가 느렸던 데다 발전상이 잘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비놀리아 비누처럼 변함없어 보인다고요. 그런데 오랜만에 와서 스마트제조러닝센터, 놀리지팩토리, 기숙사 등 ERICA의 달라진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유영창·박재영 동문, 산업공학과 88)
두 동문은 ERICA가 최근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4년 연속으로 톱10에 오른 것은 물론, 각종 평가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보고 무척 자랑스러웠다며 달라진 학교의 위상을 실감한다고 전했다. 88학번 홈커밍데이를 함께 빛내기 위해 먼길을 달려온 83~87학번 동문의 표정에도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이미 몇 년 전에 홈커밍데이를 치른 그들은 모바일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꾸준히 만나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거리에서 마주쳐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겠죠. 귀중한 기회를 매년 마련해주시니 감사해요. 홈커밍데이는 ERICA 출신으로서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행사입니다.”(박묘행 동문, 무용학과 85)
“제가 4학년 때 88학번이 1학년으로 입학했어요. 30년 만에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나이나 학번에 상관없이 만나면 즐거운 선후배 사이로 지내고 싶습니다.”(김외진 동문, 경기지도과 85)

세상을 밝히는 ERICA라는 이름

88학번 홈커밍데이 공식행사에는 88학번 동문과 83~87학번 선배 동문은 물론 1980년대 당시의 ERICA를 기억하는 교수진도 함께했다.

노을이 질 무렵 학생식당에서 신상훈 동문(연극영화학과 82)의 사회로 공식행사의 문이 열렸다. 이영무 총장과 유석구 명예교수가 환영사를 통해 30여 년 만에 다시 학교를 찾은 100여 명 동문을 반겼고, 이어 88학번 동문 대표로 안을섭(경기지도과) 동문이 단상에 올라 인사를 전했다. 안 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자원봉사로 참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신입생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현재 ERICA의 발전을 만들어가는 재학생과 교수, 학교 관계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어 타 학번 대표로 나선 83학번 이정자 동문(국어국문학과)은 5년 전 홈커밍데이로 만난 동기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며 현재 진행 중인 끈끈한 동기애를 전했다.
신상훈 동문의 유쾌한 진행과 함께한 경품행사를 끝으로 공식행사는 막을 내리고, 이어서 학생복지관 앞 민주광장에서 축하행사가 열렸다. 지난해 87학번 홈커밍데이 때와 마찬가지로 ‘추억의 길카페’를 재연하는 방식이었다. 학교 앞 미개통 인도(현 안단테광장)에서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던 그때처럼, 동문들은 학생복지관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공식행사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맥주를 곁들인 축하행사에서 눈부시게 까만 밤하늘은 좋은 술안주가 되었다. 풍물패 동아리 학생들이 공연을 했고, 실용음악학과 학생들은 유재하와 이문세 등 그때 그 시절 88학번이 좋아했던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어 사회자의 능숙한 진행과 함께 레크리에이션이 진행되었다. 무대에 오른 동문은 노래하고 춤추며 뜨겁게 달아오른 홈커밍데이의 밤을 즐겼다. 오후에 만났을 때 서먹함 반, 반가움 반이었던 동문들은 이제 서로의 얼굴이나 몸짓을 보며 웃고 이야기 나눌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민주광장에서 열린 길카페 행사에는 현 재학생 풍물패 동아리와 실용음악학과 학생들이 나와 가을밤에 걸맞은 공연을 선보였다. 뒤를 이어 레크리에이션 활동도 이어져 동문들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짧지만 짜릿했던 밤이 무르익어가고 꿈만 같던 홈커밍데이도 폐회를 알렸다. 이제 오십 대에 접어든 동문들이 재학생에게 해줄 조언은 없을까. 그들은 조언보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30년이 지나 되돌아보니 전혀 걱정할 필요 없더군요. 저도 그렇고 주변 친구도 대부분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서 갑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시간이 역시 보약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 매 순간에 충실하다 보면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충분히 빛날 수 있어요.”(유영창 동문, 산업공학과 88)
“공부나 취업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생각해봤으면 해요. 내가 누군지 알아야 방향이 잡히고, 방향이 잡혀야 목표가 분명해져요. 목표가 분명하면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공부를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의 목표와 꿈을 응원하겠습니다.”(박재영 동문, 산업공학과 88)
“별거 없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돼요. 단, 아주 ‘열심히’ 해야죠.”(이용 동문, 수학과 83)
축하행사에서 재학생이 부른 노래(유재하, <가리워진 길>)의 가사처럼 그들 앞에 높인 길이 처음부터 잘 보였던 것은 아니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여 있던 길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분명하게 보였다. 그들의 시야를 터준 것은 ERICA라는 든든한 기반,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아니었을까. ERICA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만 자리한 것이 아니다. 다시 현재의 자리로 돌아가 사회 곳곳에서 빛나고 있는 동문들의 이름 역시 ERICA다. ERICA라는 이름은 곳곳에서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Posted by hyue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