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7년 초, 미국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연설이 국내 방송사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트럼프의 말에 통역사의 목소리가 얹힌다. 일정한 템포, 정확한 발음, 논리 정연한 전개가 시청자 귀를 사로잡는다. 트럼프의 말이 안정적으로 전달된 건 통역사의 공이 컸다. 이 중요한 임무를 완수해낸 ERICA 동문 최현진 씨를 만났다.

최현진, 이라는 이름을 알린 때

지난 7월 24일 국내 최대 콘텐츠 마케팅 콘퍼런스인 ‘콘텐츠 마케팅 서밋 2018’이 열리던 서울드래곤시티의 그랜드볼룸. 왼쪽 구석 검은 부스 안에서 한 사람이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연사들의 말을 통역한다.
국가 간 회담이나 국제 콘퍼런스 등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이 모인 중요한 자리에서 소통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출동하는 그 사람. 그는 국내 정상급 통역사인 최현진 씨다.
“정식 명칭은 ‘국제회의 통역사’예요. 국제회의통역학 석사를 취득한 사람에게 따르는 명칭인데, 사람들은 흔히 동시통역사라고 부르죠.”
통역에는 연사의 발언을 다 들은 다음 통역하는 순차통역, 현장에서 따라다니며 상황에 맞게 통역을 하는 수행통역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최현진 동문이 주로 맡는 업무는 국제회의 발표 및 토론이나 저명인사의 연설을 따로 설치된 장소에서 장비를 사용해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동시통역이다. ERICA 영미언어・문화학과를 마치고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국제회의통역학 석사 학위를 받은 최 동문은 2010년부터 프리랜서 전문 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 후보 TV 토론회와 2017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비롯해 굵직한 회의 및 행사의 통역을 수도 없이 맡아 ‘대한민국 대표 통역사’로 통한다. 연사의 말을 듣고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 이를 오역 없이 이해하기 쉬운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통역사의 주된 업무. 연사가 한국어로 말할 때는 영어로, 영어로 말할 때는 한국어로 통역하는데 복잡한 현장에서 이를 원활하게 진행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TV 생중계 동시통역은 얼마나 까다롭고 부담스러웠을까.
“특히 2016년 말에 진행한 미국 대선 TV 토론회 생중계 통역은 국내에서 빌 클린턴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고 하더군요. 사회자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동시통역을 담당했는데 엄청 긴장했죠. 생방송 통역은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인 데다, 전 국민이 주목하니까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준비를 많이 했고, 자신감 있게 통역하려고 애썼어요. 평이 좋은 덕분에 ‘최현진’이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었죠.”

통역사로서 확신이 생긴 때

석탑이 하루 만에 완성되지 않듯, 통역 역시 많은 시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하다. 그가 주로 맡는 국가 간 회담 및 국제 콘퍼런스 등에서 다루는 분야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이다. 통역사의 말이 전문가에게도 자연스럽게 들려야 하는 만큼, 해당 분야에 대한 완벽한 학습과 전문용어 습득, 최신 동향 파악 등은 필수적이다. “저 같은 통역사들이 현장에서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혹시 이 분야 전문가입니까?’예요. 통역사는 외교, 군사, 문화, 환경, 교통, 경제, 경영, 의학 등 어떤 것이든 주어진 분야를 완벽하게 섭렵하고 이해한 뒤에 이를 잘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석사 시절 처음으로 현장에 나가 통역을 했을 때는 실수도 있었고 슬럼프도 겪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며 실수를 줄여나갔고, 결정적으로 지난 2016년 미국 대선 TV 토론회 생중계 통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고. 세상 일에는 무수히 많은 과정이 존재한다. 최 동문은 그 과정을 잘 풀어낸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작년 8월에 나온 책 <대통령의 연설>에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발표했던 연설문 중 아홉 편이 담겨 있다. 최현진 동문은 이 책을 번역하며 그의 탁월한 연설 능력과 소통의 힘에 감탄했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는 소통의 달인

통역사만큼 소통이 중요한 직업도 없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일 자체가 소통의 일부니까 말이다. 소통하지 않으면 통역에 능하기 어렵다. 때문에 통역사는 소통의 달인이라 불린다.
“통역이든 일반 대화에서든 우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기본입니다. 말하기 전에 우선 들어야 핵심이 뭐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 알 수 있죠. 경청한 후에는 듣는 이의 상황이나 위치를 고려해 그에 맞게 논리적으로 구성해 말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일반 대중이라면 전문용어를 남발해서는 안 되고, 말의 전개가 횡설수설해서도 안 됩니다.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가 생겨요.”
그는 소통의 달인으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뽑았다. 지난해 책 <대통령의 연설>을 준비하며 그의 연설문 아홉 편을 번역했는데, 작업하면서 그의 강약 조절에 감탄했다고.
“연설의 핵심 메시지 전달은 명확하고 강력하지만, 자국민에게는 더없이 부드럽고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분이세요. 예를 들어, 참전용사를 위한 연설에서 국민들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강한 메시지 전달과 감성적 측면 모두 듣는 이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서 나온 말이겠죠. 이것이야말로 소통의 힘 아닐까요?”

 

최현진 동문은 언어에 대한 감각과 재능, 통역을 대하는 진중한 자세는 물론 그 어떤 일에도 물러서는 법이 없는 도전정신까지 두루 갖춘 9년 차 국제회의 통역사다.

매일매일의 도전

중・고등학교 시절 중 4년을 캐나다에서 보내며 영어에 매력을 느꼈다는 최 동문은 ERICA 입학 후 이태형 교수와의 첫 면담에서 “영어로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에게 통역사를 추천해주었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최 동문은 오히려 더 악착같이 공부했다.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에 끌리는 자신의 성향과 잘 맞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학과 교수님들의 강의와 조언 덕분에 통역사가 되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는 최 동문은 이런 학교에 보답하기 위해 산업연계교육 자문위원회(IAB)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통역 일도, 학교 일도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는 최현진 동문. 그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진중한 아우라를 내뿜는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통역사가 되고 싶습니다. 통역을 부탁하는 분들이 제 존재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든든한 통역사가 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최 동문도 매일 사전과 인터넷 창을 열어놓고 연습한다. 때때로 고된 일이라 느낀다. 서로 다른 언어를 잇는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그가 뛰어난 통역사로 불리는 이유는 어려운 일을 즐기며 정면 돌파할 줄 아는 도전정신 때문은 아닐까. 매일매일 시작하는 그 도전과 함께 그의 그림은 점차 완성되어가고 있다. 최현진, 이라는 통역사가 완성할 그림에는 어떤 색채와 배경, 사람들이 담겨 있을까.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생각들을 이으려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진 않을까. 우리는 지금 9년 차 소통의 달인이 그리는 그림의 완성을 지켜보고 있다.

Posted by hyue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