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불이 꺼지면 스크린이 환하게 켜지고 그 안으로 인물 한 명이 걸어 들어온다. 카메라는 그의 발에 집중한다. 잠시 머뭇거리던 발은 어딘가로 걷기 시작한다. 그가 걸어왔던 지난 길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S#1. 인생의 방향이 바뀐 때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박기수 교수는 문학만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가 글자가 뭉그러진 영인본을 보면서 깨달았죠. 이런 식의 공부는 제 삶을 이해하고 제 문학을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자유롭게 세계를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데, 그때는 전혀 그럴 수가 없었어요.”

고민하는 그를 보고 당시 지도교수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전공을 살리면서도 재미있는 공부거리를 찾던 그의 선택은 스토리텔링이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 TV 프로그램을 비롯한 문화 콘텐츠 전반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콘텐츠 스토리텔링에 대한 공부는 순간순간 경이롭고 즐거웠다. 그 즈음(1996~1997년), 한 대학의 강사로 출강하던 그는 강의 시간에 학생에게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소개받았다. 1995년 10월 일본 도쿄TV에서 방영된 <신세기 에반게리온> TV 판(총 26화)이었다. 학생에게 넘겨받은 비디오테이프를 틀자마자 이틀 꼬박 아무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가슴 뛰는 놀라운 체험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철학적 성찰과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후 그가 콘텐츠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TV 판은 197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1960년대 생들의 이야기예요. 원폭에 대한 트라우마와 다층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품 전반에 깔려 있죠.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 나온 극장판은 또 다른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어요. 당대와 호흡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죠.”

S#2. 웰컴 투 스토리월드

그는 박사논문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며, 파고들수록 가늠할 수 없는 작품의 깊이에 매료되었다. 작품을 둘러싼 주변 반응은 더 흥미로웠다. 팬들은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터넷이나 여러 공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여러 개의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하나로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이를 경험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전적인 의미로 이야기는 창작자 1인이 만든 세계였고, 나머지는 그 이야기를 즐기는 향유자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창작자와 향유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거나 희미해지고 있다. 향유자들은 단순히 감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작품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좀 더 확장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나간다. 박기수 교수는 이를 ‘스토리 월드’라고 표현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창작자와 향유자 모두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요. 작품에 대한 댓글과 짤, 인용 등은 모두 ‘스토리 월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되지요.”

과거 창작자와 향유자의 비중이 5대 5 정도였다면, 최근에는 창작자와 향유자의 비중이 2대 8 정도로 바뀌었다. 향유자의 비중이 과거보다 커진 것이다.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고 세계관을 설파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이제는 하나의 작품이 씨앗이 돼서 함께 토론하고 소통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줄기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박기수 교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과 향유론(어떻게 즐기는가에 대한 연구)- 이 두 가지에 집중하고 있다며, 정년 때까지의 연구 과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S#3. 즐겁지 않은 것은 독

현재 박기수 교수는 문화 콘텐츠 스토리텔링 연구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지만 마냥 좋은 날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를 지도해주었던 은사들과 아내는 큰 힘이 되었다. 특히 ‘행복을 좇으라’는 아내의 말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한 마디로 남아 있다.

“제가 제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도 같아요.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거죠. 즐겁지 않은 것은 독이니까요.”

박기수 교수에게 삶은 한 편의 거대한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사람, 일상, 사물, 문화 콘텐츠 등 그 모든 것을 재료로 만들어지는 이야기 말이다. 그는 얼마 전부터 크게 욕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일을 즐길 수 있도록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찾기로 했다는 것. 타이트한 긴장감을 유지하던 그의 이야기는 이제 한결 편하고 여유로운 리듬으로 세상과 만날 것이다. 세계라는 극장에서 상영될 그의 영화, 그 속에 담길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곧 상영될 예정이다.

나를 내 삶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IC-PBL 교육
IC-PBL센터

2016년 9월 IC-PBL(Industry-Coupled Problem-Based Learning)센터를 연 한양대학교 ERICA는 최근 IC-PBL 교육을 중심으로 교육방식을 혁신하고 있다. IC-PBL 교육이란 산업체와의 연계를 통해 산업현장의 실제 과업을 학습 시나리오로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생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 수요를 반영한 문제해결능력을 기를 수 있는 수업을 말한다. IC-PBL센터의 센터장이기도 한 박기수 교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IC-PBL센터는 어떤 곳이고,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박기수 센터장: 일방적인 지식 전달에 집중했던 과거와는 달리, 앞으로의 교육은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해결능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더불어 ERICA는 산학협력이 원활한 학교인 덕분에 산업계와 연계해 실질적인 과제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기업들이 갖고 있는 실제 문제를 바탕으로 교수가 학습 시나리오를 개발하면, 학생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토론하며 아이디어를 쏟아냅니다. 교수는 이때 앞에 나서는 대신 전체를 관찰하고 관리하는 정도를 담당합니다. 학생들 스스로 수업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셈이에요.

Q: IC-PBL 수업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박: 처음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실제 나타난 효과는 긍정적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작년에 진행한 ‘이노베이션 프로젝트’ 수업에서 신용카드 영수증을 활용한 1인 방송이나 푸드트럭 관련 방송 아이디어가 나온 적이 있어요. 물론 그 학생들이 직접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유사 콘셉트의 공중파 TV 프로그램들이 방송을 시작했죠.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언제든 실현될 수 있다는 방증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창의적이고 빛나는 생각들이 쏟아지면서 ERICA의 IC-PBL 수업을 밝게 빛내주고 있습니다.

Q: IC-PBL 수업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요?

박: 문제해결능력은 기본이고, 협업능력도 기를 수 있겠죠. 수업은 대개 조 단위로 이루어지니까요.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학생들 스스로 수업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점이에요. 교수나 강사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문제의식과 개념, 결론을 모두 소통을 통해 만들어내죠. 이런 주체적인 학습 습관은 단순히 공부뿐 아니라 학생들 앞으로의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으니까요.

Posted by hyue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