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은 세계적 수준의 전문성”

지난 30여 년간 자동차나 비행기, 선박, 기차 등 구조물의 최적설계를 연구해온 기계공학과 박경진 교수는 ‘등가정하중법’을 개발하고 국내를 넘어 해외 유수의 산업체에서 의뢰한 연구과제들을 수행하며 세계적 수준의 전문성을 쌓았다. 이제 박경진 교수는 후학을 위해 지난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안전을 위한 최적설계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 한 대. 박경진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면 비뚤비뚤 성글게 칠해진 자동차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보아도 어린 아이가 그렸을 이 그림은 오래전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딸이 그려줬던 그림이다.

“아마 제 딸이 자동차 설계를 연구하는 저를 보고 자동차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이제 자동차는 ‘알아서 움직이는’ 자율주행차로 발전하고 있다. 운전자가 조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주행 자동차 말이다. 하지만 갑자기 인도에서 보행자가 뛰어들면 어떻게 할까. 이와 같은 사고에 대비해 자동차는 충돌에 의한 보행자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 박경진 교수는 자동차와 보행자가 충돌하는 아찔한 시뮬레이션 장면을 보여주며, 자동차의 범퍼나 후드를 설계할 때는 충돌 시 보행자의 상해를 줄일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비행기, 기차, 다리 등 구조물은 외력으로부터 견딜 수 있도록 안전성과 함께 경량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최적화 이론이라는 수학적 방법론을 공학적 설계에 적용해 구조물의 모양이나 부품의 치수를 정밀하게 산출한다. 박 교수의 주요 연구 분야는 이러한 구조 최적설계. 특히 20여 년 전, 등가정하중법이란 새로운 구조최적설계법을 개발, 다수의 산학협력을 통해 자동차, 중공업, 전자, 조선 등의 구조물을 설계해왔다. 지난 2013년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기초·원천연구 중에서 10개 기술을 선정해 사업화를 지원한 바 있는데, 등가정하중법이 이에 선정되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연구 의뢰 활발

등가정하중법이 다양한 산업체의 주목을 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의 최적설계기술은 구조물 변형이 정적으로 매우 적은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등가정하중법은 동적 힘이 가해지는 구조물이나 변형이 심한 구조물에도 적용할 수 있다. 현재 등가정하중법은 세계적인 구조 최적설계 소프트웨어인 하이퍼웍스(HyperWorks), 나스트란(NASTRAN), 제네시스(Genesis) 등에 탑재돼 상용화된 상태다. 상용화를 통해 그동안 연구용으로 사용되던 등가정하중법이 다양한 산업체에 실질적으로 사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경진 교수의 등가정하중법에 대해서는 국내 산업체뿐 아니라 해외 산업체에서도 관심이 높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부터 미공군연구소, 보잉(Boeing), GM, BMW 등의 연구과제를 의뢰받아 비행기 날개나 엔진의 구조최적설계, 자동차 전반부나 지붕의 안전설계 등을 수행해왔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연구를 의뢰하는 국내 기업들과 달리, 해외 기업들은 국제저널이나 국제학회에 발표된 박 교수의 논문을 보고 자사 제품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직접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도 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미국의 IT기업 알테어(Altair)가 등가정하중법을 상용화했으나 일반화에 어려움이 있어, 그에 대한 소프트웨어 개발을 박 교수에게 의뢰했다. 또한 2008년 연구과제를 의뢰한 바 있던 GM이 이번에는 충돌 시 안전설계 결과를 3D 프린터로 제작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박 교수에게 SOS를 청했다.

처음 해외 과제를 수행할 때만 해도 수차례 해외 출장을 다녀야 했던 박경진 교수. 하지만 지금은 통신기술의 발달로 온라인 화상회의로 세미나를 진행해 해외 과제를 진행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해외 엔지니어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에는 영어 실력이 필수.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이기 때문에 국적을 초월해 연구과제를 의뢰하는 추세입니다. 자신이 보유한 기술을 글로벌하게 사용하려면 반드시 영어를 익혀야 합니다.”

기계공학은 세심하고 정교한 학문

박경진 교수는 해외 기업 연구과제라고 해서 국내 기업의 연구과제보다 특별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단지 소통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하지만 해외 기업들을 시찰하며 부러운 점은 한 가지 있었다. 백발의 엔지니어들이 여전히 현장을 누비며 기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풍토가 그것. 그만큼 엔지니어들이 전문성을 쌓아 독보적인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박 교수는 연구자에게도 전문성이 중요한데,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전문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기업들은 그 나라에서 해당 전문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의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만의 고유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기술이 선진국보다 뒤처졌을 때는, 그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우거나 그들을 설득해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타협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세계적인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스스로 육성해야겠죠.”

그러한 의미에서 박 교수는 연구자로서 최고의 성과와 보람을 후학 양성에 두고 있다. 1989년 본교에 부임한 이래 85명의 석사와 31명의 박사를 배출한 박 교수. 박 교수의 연구실 한쪽 벽면에는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 한 명 한 명과 나란히 찍은 졸업 사진들이 가득하다. 박 교수에게 그 사진들은 지난 30여 년의 세월이 선사하는 훈장과도 같다. 졸업생들은 현재 다양한 산업체에서 활발히 활약하고 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박사 졸업생 중 여학생은 3명밖에 없다는 것.

박 교수는 현재 기계공학전공에 압도적으로 남학생 수가 많지만 여학생에게 전혀 불리하지 않은 전공이라며, 관심을 당부했다.

“사실 기계공학은 세심하고 정교한 특성이 필요한 학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특성을 지닌 학생들이 남녀 구별 없이 입학하면 좋겠습니다. 역학이나 수학 등 기초학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유행에 휩쓸리지 않아 산업체 수요도 많은 편입니다.”

후학을 위해 30년 연구 성과 집대성

“1호 박사를 배출했을 때만 해도 저와 학생의 나이차가 크지 않았습니다. 근데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 나이는 비슷한데, 저 혼자 나이를 먹고 있네요.” 졸업생들과의 사진 속에서는 여전히 30대의 모습을 한 박경진 교수. 그러나 어느덧 4년 후로 다가온 퇴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논문이나 책으로 후대에 남기는 것이다. 2007년 세계적인 과학전문 출판사인 스프링거(Springer)에서 강의 내용을 엮어 <해석적 설계방법론(Analytic Methods for Design Practice)>을 출판한 바 있는데, 미흡한 점이 많다며 새로운 책을 출간하고 싶다고 전했다.

“젊은 시절에는 자기만족이나 성취감을 위해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퇴를 바라보는 때가 되니 후학을 위해 그간의 연구를 정리하고 싶습니다.” 틈틈이 시간을 쪼개 이미 집필 작업에 들어간 박경진 교수. 지난 30여 년의 연구인생이 고스란히 담길 필생의 역작을 두 손 모아 고대하는 바이다.

Posted by hyuerica